꽃뱀
link  관리자   2023-04-05

찔레꽃 덤불 아래 온몸에 꽃무늬가 박힌 꽃뱀 한마리가 살고 있었어.
꽃뱀은 하늘, 구름, 꽃 같은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했단다.
꽃뱀은 또, 찔레꽃 덤불 아래 똬리를 틀고 누워 잠자는 것도 아주 좋아했어. 잠을 자면 으례 꾸곤 하는 아름다운 꿈 때문이었지.
다른 뱀들은 그 꽃뱀을 '잠꾸러기 꼬마 꽃뱀'이라고 불렀단다.
그런대 잠꾸러기 꼬마 꽃뱀은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어. '나는 그냥 꽃뱀인ㄴ 채로 내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꽃뱀은 제가 꽃뱀인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나은 무언가가 되고 싶었어. 딱 꼬집어 무엇이 되고 싶다고 아직은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어느날 오후였어. 그 날도 꽃뱀은 찔레꽃 덤불 아래서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고 있었단다. 꽃뱀은 꿈에 무지개를 보았어. 선명하고 눈부신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구름다리 같았어. 무지개가 너무나 아름다워 꽃뱀은 눈물이 다 났어.
순간 꽃뱀은 꿈에서 깨어났지.
꽃뱀은 저도 모르게 찔레꽃 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았어. 봄날 오후에 새파란 하늘에는 무지개 대신 흰구름 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어.
그 때 사륵사륵 풀잎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어. 꽃뱀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내아이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어. 초롱초롱한 두 눈과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 .
꽃뱀은 넋을 잃고 사내아이를 쳐다보았어. '참 아름다운 사내아이구나' .

놀라운 일이었어. 사람이, 더구나 짓궂은 사내아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다니!
문득 사내아이가 고개를 돌렸어. 사내아이의 눈과 꽃뱀의 눈이 마주쳤지. 사내아이가 의젓하게 말했어.
"너 따위 징그러운 꽃뱀은 조금도 무섭지 않아. 난 간밤에 용을 타고 하늘 높이 오르는 꿈을 꾸었거든." 사내아이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멀리 사라졌어.

꽃뱀은 다시 찔레꽃 덤불 아래 똬리를 틀고 깊은 생각에 잠겼단다.
'그 앤 날 보고 징그러운 꽃뱀이라고 했어. 징그러운 꽃뱀이라니.... .
꽃뱀은 놀랍고 또 슬펐어. 하지만 그보다 더 호기심이 마음속으로 고개를 내밀었어.
;그 애가 말한 용이란게 대체 뭘까? 나도 용이 되어 그 애를 태우고 하늘 높이 날고 싶다.' 그러다 꽃뱀이 깜짝 놀랐어. 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 난 용이 되겠어. 아니 용 말고 다른 것은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꽃뱀은 용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용이 되는지 알지 못했어.
언뜻 산 중 큰 동굴 옆 풀숲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뱀이 떠올랐어. 할아버지뱀은 남달리 지혜로운 뱀이었어. 그래서 뱀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 뱀을 찾아가곤 했단다.

'그래, 할아버지는 분명 알고 계실거야.'
저녁빛이 푸슬푸슬 내릴 즈음, 꽃뱀은 찔레꽃 덤불 아래서 나와 산으로 기어올라갔어.
동굴 옆 풀숲에 이르자, 꽃뱀은 쉬쉬 소리내며 할아버지 뱀을 불렀어. 할아버지 뱀이 풀숲에서 고개를 쓱 내밀었단다.
"네가 웬일이냐? 잠꾸러기 꼬마 꽃뱀아."
할아버지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이상하다는 낯빛으로 물었어.
"알고 싶은게 있어요, 할아버지 용이 뭐예요?"
할아버지 뱀은 혀만 날름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할아버지 뱀이 입을 열었어.
"오래 전부터 나는 누군가가 용에 대해 물어주기를 기다려 왔단다." 꽃뱀은 숨을 죽이며 할아버지 뱀을 다음 말을 기다렸어.

"용은 우리 뱀들이 꾸어야 하는 큰 꿈이란다. 예전에는 용이 되기를 꿈꾸는 뱀이 많았는데, 요즘은 아무도 그런 꿈을 꾸지 않아. 세상이 메말라진 때문일 게다. 그런데 너 같은 꼬마 꽃뱀이 그 꿈을 꾸다니..... .
할아버지 뱀은 아쉬움과 흐믓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어 . 꽃뱀은 급한 마음에 다그치듯 물어 보았지.
"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용이 될 수 있나요?"
"그건 스스로 깨우쳐야 해. 나도 예전에 용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만, 보다시피 꿈을 이루진 못했단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용이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거야. 비를 내리게 하여 농사일이 잘 되게 도와 주기도 하지. 또, 꿈에 용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도 하더구나. 그래서 사람들은 용을 무척 좋아한단다."

할아버지 뱀은 꽃뱀을 위로하듯 다정하게 바라보며 계속 말했어.
"꿈꾸는 일은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아프고 괴롭기도 하단다. 하지만 그 아픔과 괴로움을 이겨 내야지만 꿈을 이룰 수가 있지."
꽃뱀은 몹시 실망하여 기운 없이 느릿느릿 산을 내려왔어. 어느새 하늘은 짙은 남빛으로 곱게 물들어 보석 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어.

찔레꽃 덤불 가까이 왔을 때였어. 꽃뱀은 덤불 아래로 들어가는 대신, 마을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사내아이의 집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거야.
꽃뱀은 마을 길 옆 풀숲을 헤치며 한참 나아갔어. 그러다 저도 모르게 다 쓰러져 가는 어느 초가집 뒷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지. 흐릿한 불빛이 뒷벽을 향해 난 작은 봉창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어.
꽃뱀은 얇은 흙벽에 바싹 몸을 붙였어. 방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이제 그만 자거라, 한이야."
"조금만 더 공부하다 잘게요."
바로 사내아이의 목소리였어. 꽃뱀은 가슴이 콩콩 뛰었어.
"한이야, 배고프지 않니? 양식이 넉넉하다면 밤참이라도 만둘어 줄 텐데...... ."
한이, 꽃뱀은 마음속으로 사내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
"괜찮아요, 어머니. 저만 배고픈 게 아니라,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 모두 그런걸요. 어머니,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잘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요."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거야"
"저는 할 수 있어요. 전 꿈을 꾼걸요. 용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어요. 하늘 저편에는 배고픈 사람도 없고 슬픈 사람도 없는 좋은 세상이 있었어요. 전 이 세상을 반드시 꿈에서 본 좋은 세상으로 만들 거예요."

한이 어머니의 한숨 소리만 들릴 뿐, 방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꽃뱀은 몸을 돌려 찔레꽃 덤불 아래로 돌아왔단다.
꽃뱀은 덤불 아래 똬리를 틀고 눈을 감았어. 용이 무엇인지, 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알지 못했지만, 마음은 편안했어.
한이와 용이 도ㅚ고 싶은 제 꿈이 있어서 꽃뱀은 행복했어. 꿈을 잃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용이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
그 때부터 꽃뱀은 새나 개구리나 들쥐들을 함부로 잡아먹지 않았어. 아주 배가 고플 때에만, 허기를 면할 만큼만 잡아먹었지.
'한이는 지금 배가 고플지도 몰라. 나만 혼자 배불리 먹을 수가 없어.'
배고품을 참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
"아픔과 괴로움을 이겨 내야지만 꿈을 이룰 수가 있지."
언젠가 할아버지 뱀이 해 준 그 말과 한이를 생각하면서 꽃뱀은 배고픈 괴로움을 잘 이겨 냈단다.

여름이 다가왔어. 여름은 뱀들이 무성하게 자란 풀잎 사이를 헤지고 다니면서 먹이를 찾기에 바쁜 때란다.
그러나 꽃뱀은 또 다른 걱정과 괴로움에 휩싸여 여윈 몸이 더욱 가늘어지고 있었단다. 비를 내려주지 않는 하늘 때문이었어.
꽃뱀은 알고 있었지.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아 농사를 망치면 한이와 마을 사람들 모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을.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과 밭둑을 멀리서 바라볼 때마다 꽃뱀은 온몸이 저릿저릿 아팠어. 마치 가늘고 긴 제 몸이 갈라지는 듯했어.

꽃뱀은 사람처럼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고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단다.
'내가 용이라면 지금 당장 비를 내려 줄 텐데..... . 그래, 한이와 사람들을 위해서 난 꼭 용이 돌테야.'
그러던 어느날,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어. 천둥은 낮게 드리워진 잿빛 하늘에서 쿠릉쾅쿠릉쾅 울어 댔어. 날카로운 번개가 하늘을 가르더니, 기다리던 비가 마침내 좌악좌악 쏟아졌어.
꽃뱀은 찔레꽃 덤불에서 나와,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았어.
길 저편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왔어. 사람들은 빗속을 뛰어다니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
꽃뱀도 마음속으로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단다.
비는 계속 쏟아졌어. 찔레꽃 덤불 아래쪽에도 물이 가득 찼단다.
세찬 흙덩이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꽃뱀은 가까이 있는 나무로 기어올랐어. 꿈을 이룰 때까지, 용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아.

꽃뱀은 굵은 나뭇가지에 몸을 감았어. 그리고는 제 보금자리였던 찔레꽃 덤불이 흙탕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단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다시 새파래졌더. 서늘한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어.
꽃뱀은 마을 가까이 있는 연못가 바위 그늘로 자리를 옮겼어. 그리고 그곳에서 가을을 보냈단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꽃뱀은 더욱 야위어갔어. 이젠 먹이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어. 싸늘한 바람도 견디기 힘들었지.
하지만 꽃뱀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따뜻했어. 마음속에 한이와 용이 되고 싶은 제 꿈이 무지개처럼 어려 있었거든.
바람이 차가워졌어. 풀숲은 누렇게 시들고, 벌레 먹은 가랑잎이 사방을 굴러다녔지.

어느 달 밝은 밤, 꽃뱀은 한이의 집으로 갔어. 한이에게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거든. 이제는 더 이상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어. 다른 뱀들은 지금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으니 말야.
달빛 환한 한이의 집 뒤뜰로 기어들어가, 꽃뱀은 한이의 방 흙벽에 몸을 바싹 갖다 댔지.
"춥지 않니, 한이야? 방에 불을 때기는 했다만..... ."
"참을 수 있어요. 저만 추운게 아니잔하요, 전 이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머니가 겨울에도 춥지 않도록 해 드릴 거예요. 어머니뿐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가 춥지 않도록 해 주고 싶어요."
"좋은 꿈이긴 하다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게야."
"전 꼭 할 거예요."

꽃뱀은 곱아드는 듯한 온몸을 흙벽에 바싹 붙인 채 생각에 잠겼어. 한이와 많은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추위를 함께 견디고 싶었어. 지금 땅속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쩐지 겨울잠을 편히 잘 수 없을 것 같았어.
어젠가 할아버지 뱀이 말했지. 아픔과 괴로움을 이겨 내야지만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꽃뱀은 마음을 다 잡았어.
'그래, 견뎌 볼거야 , 한이와 사람들과 함께 추위를 견뎌 볼 거야.'
꽃뱀은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연못가 바위 그늘로 돌아왔단다.
며칠이 지났어. 채찍처럼 매서운 바람이 북쪽에서 밀려 왔어. 마을 가까이 있는 연못에 어느 날 밤 살얼음이 얼었단다.

그날 밤, 꽃뱀은 꽁꽁 언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바위 그늘에서 나왔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한이의 집으로 가고 싶었어.
하지만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어. 이제는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단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더.
'한이와 사람들이 춥지 않게 어서 겨울이 자나갔으면.... .'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겨 왔어. 꽃뱀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향기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꽃 향기는 더욱 짙어지고 향긋해졌단다. 마악 잠이 들려 할 때처럼 온몸이 나른해졌어. 이어 꽃뱀으니 몸은 꽃향기에 실려 하늘로 가볍게 날아올랐어.

누군가가 꽃뱀의 등에 살짝 올라타더니 다정하게 속삭였어.
"넌 용이야. 하늘 높이 날아야 해. 나하고 같이 좋은 세상으로 가자." 한이, 그리운 한이의 목소리였단다.

순간 꽃뱀의 눈앞이 환해졌어. 춥고 캄캄한 밤인데도, 하늘 저편에서 무지개가 뜨지 뭐야. 언젠가 꿈에서 본, 선명하고 눈부신 구름다리 무지개였어.꽃뱀은 기쁨으로 온몸을 후들후들 떨며 무지개 다리 위로 훌쩍 날아올랐단다.
이튿날 아침, 서당으로 가던 아이들은 연못가에서 얼어 죽은 꽃뱀 한마리를 보았단다.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어.
"춥고 배고파서 죽었나 봐, 꽃뱀이지만 불쌍해."
눈이 초롱초롱한 한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지.
환한 겨울 햇살이 연못가에 잠자듯 편안하게 누워 있는 꽃뱀을 따스하게 비춰 주었단다.












100년 후에도 읽고싶은 한국명작동화
강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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